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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서적/추천도서 2018-05-03T13:23:55+00:00

호식총(虎食塚)과 창귀(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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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2-1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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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식총(虎食塚)과 창귀(창귀)

호식총과 창귀
*아래의 호질(虎叱)을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퍼 왔습니다.

호식총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영혼을 `창귀'라고 한다.
'청우기담(聽雨奇談)'이라는 책에 “창귀는 호식당한 사람의 영혼으로, 감히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호랑이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창귀에는 여러 이름이 있는데, 박지원의 '호질'에는 `굴각(屈閣)' 등의 이름이 보이고, 민간에서는 `홍살이 귀신', 특히 태백지역에서는 좀더 토속적으로 `가문글기'라 한다.

창귀는 지옥같은 호랑이의 위세권에서 탈출하려고 `사다리' 또는 `다리'라고 불리는 행위를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것으로 물귀신과 흡사한 행위이다. 창귀는 늘 사돈네 팔촌까지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새 창귀감을 구하는데, 반드시 사람을 불러내거나 유인하여 범에게 데려간다. 그래서 호식되어갈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막아도 창귀가 씌여 자꾸 나가려 하는 등 이상행동을 한다.

창귀가 이처럼 끈질기고 무섭다는 데서 호식총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분묘가 유래한다. 호랑이가 먹다 남긴 유구(遺軀)를 태우는 것은 모든 화근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즉 창귀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이다. 호식총에 돌을 쌓는 것은 신성한 지역임을 뜻함과 동시에 창귀를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는 금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또 돌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으니 후손들이 벌초하러 와서 창귀 들릴 일도 없겠다. 돌무덤 위에 시루를 엎어놓는 것은 하늘을 뜻하는 것이며, 철옹성으로 창귀를 가두어 놓는다는 뜻과 살아있는 것을 쪄서 죽이는 무서운 그릇이라는 뜻도 담겨있다. 그 시루 위에 또 쇠가락을 꽂아두는 것은 무기 또는 벼락으로 창귀를 제압하고자 함이며, 가락의 용도처럼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최성민 1998년01월01일한겨레



태백산 일대 산간마을 호식총

태백시 창죽 조대장터 어귀에 힘이 장사인 김씨가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김 장군'이라 불렀다. 그는 눈썹이 유난히 길었다. 옛말에 눈썹이 길면 호식(虎食) 당할 상이라 했다고 사람들이 말하니, 그는 크게 웃으며 그런 소리 말라 하였다.

까마귀가 몹시 울던 어느날, 김씨는 집앞 개울가에서 나무를 하다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갑자기 범이 나타나 앞발로 김씨의 배를 찍어 당겼다. 놀라 일어난 김씨는 범과 마주 엉겨붙어 뒹굴었다. 근처에 있던 아내가 달려왔으나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기만 하다가 웃마을로 사람들을 부르러 가는 것이었다. 김씨는 “사람 데리러 갈 것 없이 낫이나 도끼 아무것이나 나에게 던져만 주면 된다!”고 악을 썼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 김씨는 간 데 없고 뼈만 남아있었다. 그곳에서 화장을 한 뒤 돌담을 치고 시루를 엎으니 사람들은 그 자리를 `장군 화장터'라고 부른다.

태백시 문곡동 편뜰에 살던 대(大)씨 집안의 여자 아이가 며칠전부터 장세마골 산등을 쳐다보며 자꾸 슬피 울더란다. 집에서는 아이가 어디 아픈가 하면서도 별일은 없겠지 하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날 아버지는 춘양장에 다녀와서 잠시 누워있었고, 어머니는 방앗간에서 보리를 찧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버석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범이 나타나 아이를 눈 깜짝할 사이에 물고 갔다. 장세마골 산등 바위 위에 아이의 머리만 남겼는데, 혀로 머리를 싹싹 빗어 왼 가르마를 지어 놓았더란다. 그 자리에서 화장을 하고 시루를 엎었다.

이런 얘기는 불과 40~50년전에 태백산 주변에서 일어난 `실화'로서 호식총(虎食塚)이라는 물증과 함께 구전돼 온다. 사람들은 왜 하필 그토록 호랑이 들끓는 산중에 한사코 눌러 살아야만 했을까? 호랑이해의 첫 나들이 여정을 태백산쪽으로 잡으면 우리 땅, 우리 삶과 호랑이의 관계를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그리 험하지 않은 산에도 숲이 울창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다. 그 마당에 느리고 힘약한 동물인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례가 무수히 많았다. 호랑이를 무서워해 “범에 물려갈 놈”이라는 악담이 생겼고, 악독한 전염병(콜레라) 이름을 `호열자'라고 짓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2년에 경상도에서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은 사람이 수백명이라는 기록이 있고, 중종 19년에는 황해도에서 호랑이에게 상한 사람이 40여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영조 19년에는 평안도 강계에서 20여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으며, 영조 28년에는 호랑이가 경복궁 후원에 들어왔고, 영조 30년에는 경기도에서 한달동안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사람이 120여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나타나 한양의 백성들을 물고 갈 정도라면 산골마을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랑이 밥이 되었을까?

태박산맥의 어미산인 태백산을 중심으로 사방 200~300리 안에는 예로부터 화전민이 많이 살았다. 그들에게는 호식장(虎食葬)이라는 독특한 장례풍속이 있었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난 뒤에 남기는 유해를 거두어 장사하는 것을 말한다. 유해가 놓인 자리(호식터)에서 화장을 하고 그 위에 돌무덤을 쌓고 또 그 위에 시루를 엎고 시루 한가운데 구멍에 물레의 쇠가락을 꽂아넣어 호식총이라는 무덤을 만드는 것이다.

태백문화원이 낸 '호식장'(김강산 저)이라는 책에 따르면 태백산 기슭에 들어선 모든 산간마을에 호환(虎患)의 사례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태백시 철암동 버들골 설통바우밑 화장터 등 태백에 33곳,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범든골 호식터를 비롯해서 삼척에 53군데, 정선군 북면 유천리 송천 건너 개금벌 속골 호식터 등 정선에 33곳, 영월시 상동읍 구래리 연애골 호식터 등 영월에 5곳 등 강원도에서 경상북도 일대 산간마을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파악된 곳만 해도 158곳에 이른다. 이런 곳에는 영락없이 호식총이 들어서 있고, 10여년전까지만 해도 호식되어간 상황 목격담을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촌로들이 살고 있었다 한다.

그러면 왜 태백산 일대 사람들은 호랑이 밥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호랑이골에 눌러 살았을까? '호식장' 저자 김강산씨는 호식터 답사와 촌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숙명론'을 주장한다. “혹독한 정치와 관리의 횡포, 과중한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 猛於虎)”는 공자 시절의 말처럼 태백산맥 안으로 들어와 살던 화전민 가운데는 혹독한 세상, 과중한 세금과 부역 등에 쫓겨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차라리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더라도 숙명으로 알고 묵묵히 화전을 일구며 마음의 평정을 구했으며, 호식된 상황을 신성한 경지로 격상시켜 슬픔을 미화하려 했다. 태백시 문곡동 등 태백산 일대 산당(山堂)에는 으례 산신령이 호랑이 등을 타고 나타난다. 또 호랑이 자체를 `우습고 착하고 인자한' 산신으로 받드는 곳도 많다. 이는 호랑이를 격하시켜 심리적 우위를 차지하고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겠다는 의지표현과 함께, 절대적 강자에 대한 불가항력적 좌절감을 `신과 인간의 관계' 설정을 통해 `굴복의 숙명론'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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